나는 무언가를 왜 끄적거리는가 그리고 왜 공유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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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언가를 왜 끄적거리는가 그리고 왜 공유하려 하는가

“나는 무언가를 왜 끄적거리는가 그리고 왜 공유하려 하는가”

나의 행동은 “글을 쓴다”라는 표현보다는 “글을 끄적인다”라는 표현이 어울리고, “글”이라는 거추장스러운 단어보다는 “무언가”라는 애매모한 단어가 어울린다. 나는 무언가를 배우며 사유를 시작하고, 팬을 잡고 글과 그림을 통해 사유를 표현할 수 있게된 순간부터 끊임없이 끄적였다. 그 동안의 끄적임은 정제되지 않은 형태로 나를 위한, 나에 대한 나와의 끄적임이었다면, 이제는 충분히 무르익은 지식을 표방한 끄적임으로 미래의 나, 우연히 지나가다 본 타인과의 공명을 위한 끄적임이 되기위한 노력 하려한다.

나는 왜 무언가를 끄적이는가

프랭클린 플래너(Franklin planner)부터 노션(Notion)까지.

시간의 흐름에따라 나의 끄적임을 받아주는 노트의 형태는 끊임없이 변해갔다. 20대 끄적임의 시작은 프랭클린 플래너였다. 브랜드 충성심이 강한 20대 나에게(물론 지금도 그렇다) 역사를 간직한 프랭클린 플래너는 보잘것 없는 끄적임을 간직하기에 최고의 노트였다. 지금도 본가 구석 어딘가에는 약 2년동안의 끄적임을 간직한 노트가 프랭클린 바인더에 잠들어 있다.
 
franklin planner binder
franklin planner binder
프랭클린 이후 나의 끄적임은 얼리어답터를 표방하지만, 발전하는 기술에 뒤쳐지기 싫어하는 구세대처럼 새로운 형태를 끊임 없이 시도했다. 언제 어디서든 접근 할 수 있는 접근성과 휴대의 용이성은 자연스럽게 나를 클라우드 시스템으로 이끌었다. Apple의 기본 notes앱, Fantastical앱 그리고 Evernote등 많은 것들이 나의 끄적임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될지, 기미상궁에 빙의하여 그 누구보다 깐깐하고 높은 기준으로 평가하였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라는 표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순간이 있을까 싶다.
덕분에 이시기의 나의 기록은 모든곳에 퍼져있고, 몇 번의 통합을 위한 노력을 하였지만 두서없는 형태와 게으름으로 이전 프랭클린 플래너와 마찬가지로 어딘가의 구석에서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다. 프랭클린 플래너와 차이점이 있다면, 탄소(C)와 수소(H)등으로 이뤄진 종이의 형태가 아닌 1과 0의 형태로 웹(web) 구석 어딘가에 있을 뿐이다.
2014년 5월 4일에 기록된 끄적임의 방법에대한 치열한 고민.
2014년 5월 4일에 기록된 끄적임의 방법에대한 치열한 고민.
위와 같이 나의 인생을 함께하고 있는 끄적임의 기록관은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노션(Notion)에 정착했다. 그리고 지금의 환경을 꽤나 만족하는 것 같다. 어디서든 접근 용이하고, 형태가 자유로우며, 필요시 프로그래머인 나의 능력을 빌려 새로운 기능도 어렵지 않게 들여놓을수 있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이 공간을 남들과 어렵지 않게 공유(share)가능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다른 이의 공간을 쉽게 들여다 볼 수 있다. 물론 10여년의 여정을 통해 얻은 교훈이 있다. 변화는 빠르게 그리고 충분히 인식하기전에 찾아온다. 그래서 항상 떠날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좋다. 다행히 노션은 충분한 API를 제공하고 있다. 나는 그저 한 명의 이성적인 데이터 사이언티스가 되어 태깅(tagging)과 인터페이스(interface)만을 관리하면 된다.
 

 

늦은밤 게임을 즐기는 순간부터 인류의 발전을 고민하는 순간까지

처음 나의 노트는 사실상 가계부와 주간/월간 플래너에 불과했다. 숫자와 통계를 좋아했었고, 이때문인지 누가시키지도 않았지만 초등학교부터 꾸준히 가계부를 썼다. (심지어 군대에서도 썼다) 이렇게 무언가를 쓰고 기록하는 습관은 수능을 준비하던 고등학교시절과 20살부터 시작된 학원강사라는 상황으로 인해 일주일과 한달을 기록하고 계획하는 플래너로 발전하였다.
숫자와 이성적인 계획으로 차있던 매우 ‘TJ’스러운 노트는 뒤에서 더 자세히 공유할 일련의 사건을 지나면서 밤늦게까지 게임을 하며느끼는 현타의 순간과 방구석에서 인류발전에대한 고민의 순간까지 다양한 주제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악마로부터 세상을 구한 새벽 1시의 도날드.
악마로부터 세상을 구한 새벽 1시의 도날드.
2023년 11월에도 여전히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도날드.
2023년 11월에도 여전히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도날드.
그 중 시간이 흘러도 기억에 남는 끄적임이 있다면, 2016년 지출에대한 생각이다. 그 순간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지출”이란 행위에대해 항상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궁금증이 있었고, 그날따라 이러한 생각이 반복적으로 일어났고 결국 그 자리에서 생각을 남겼다. 생각은 아래처럼 마인드맵으로 남겼다. 글, 그림, 키워드등등 무언가를 남기는 방법에는 많은 방법이 있는데, 목적이 불명확한 생각 또는 어떠한 답이 필요한 경우가 아닌 생각 그 자체를 남길때에는 마인드맵이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다시 그때의 기록을 보면, 그 어떠한 대단함도 또는 날카로운 통찰력더 없다. 그보다는 “나는 오늘~”로 시작하여, “~ 참 재미있었다.”로 끝나는 어릴적 일기와 유사하다. 그러나 내가 느끼고 기록하고 싶은것은 끄적임속 절대적인 콘텐츠(contents)가 아닌 생각하고 고민하던 그 순간의 느낌이다.
시간이 흘러 소위 어른이 되어가는 순간이 오면, 이전처럼 자유로운 생각에 빠져있을 여유가 없다. 물론 슬프지만, 자유로운 생각자체가 줄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머리는 한번 자라난 생각을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으면 놓아주질 않았다. 마치 생각의 저주에 걸린것처럼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면서 나를 방해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 가상의 ‘생각주머니’였다. 생각을 돌돌 말아 일단 주머니에 던져났다. 그리고 나중에 주기적으로 시간을 가지고 하나씩 꺼내어 생각을 이어갔다.
그러나 “언젠간 입겠지” 하면서 장롱 깊숙이 넣어논 유행이 지난 옷처럼 한번 던져진 생각은 기대했던것만큼 자주 보지는 못했다. 이에대해 여러 이유가 있을것이다. 새로운 유행에 맞는 옷에 밀릴수도 있고, 삶에 지쳐 어떠한 옷을 입을까하는 기대감보다 그저 익숙한 옷에 손이가서 그런것일 수 있다. 이유가 어떻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언제부터인가 나의 노트에는 끝맺히지 않은 생각들만 남게되었다.
빈도수가 줄어들어 주머니의 형태가 된 끄적임들
빈도수가 줄어들어 주머니의 형태가 된 끄적임들

나는 왜 끊임없이 끄적이는가.

그렇다면 나는 왜 끊임없이 끄적였고, 무엇이 나를 행동하게 만들었을까. 이글을 쓰기에 앞서 지난 10년여동안의 끄적임을 돌아봤다. 그리고 그에대한 이유를 몇가지로 설명할수 있을거 같다.
먼저, “그래야만 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한 것은 2012년 대학을 자퇴하기로 마음먹은 그 이후부터 인듯하다. (물론 자퇴서를 작성하고 제출까지했던 나는, 돌아가서 박사과정까지 밟고 있다.) 그 당시 나의 머리는 정돈되지 않은 상태 그 자체였고, 넘쳐나는 생각을 어찌할줄몰랐다. 아쉽게도 그 당시 나의 주변에는 이런 내가 기댈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 물론 시간이 지난 지금은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 나는 내스스로 어떠한 정신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시험문제를 풀어야 했지만,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을 막지 못하고 있었으며, 친구와 이야기하고 있다가도 순간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시작되면 그것을 막을수 없었다. 하다못해, 그러한 생각이 자본주의의 고질적 문제점인 빈부격차를 해결하거나 리만가설을 푸는등의 천제적인 생각이었으면 스스로를 천재라고 착각이라도 했을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지나가는 저아이는 세포분열을 하면서 물리적으로 커지겠지”와 같은 큰 의미없는 생각들뿐이었다.
다른 하나는 나의 가치관을 위해서이다. 가치관은 한명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가치관이 어떠한 삶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던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절대적인 삶의 정답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생의 갈림길에서 자기만의 기준이 되어 삶의 의미를 만들어주는데 큰 도움을 줄 수는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오랜시간 가져온 인생의 가치관이 있고, 그것들은 살면서 한번쯤 들어봤을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다. 다음의 가치관은 고등학생과 독서를 정말 많이 했던 20대초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변화없이 유지되고 있으며, 각기 저만의 이유로 무언가를 끄적이는데 관여하고 있다.
 
  1. “용기를 내어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 않아 그대가 사는 대로 생각하게된다.”
  1. “말보다는 행동”
  1. “경험은 사유의 기회를 줄뿐, 사유를 주지 않는다.”
  1.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다르다”
 
  • “용기를 내어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 않아 그대가 사는 대로 생각하게된다.”
    • 나의 삶에 핵심이 되는 가치관이다. 나는 그래야만 해야하고, 으레 그렇게 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을 싫어했고 하지도 못했다. 종국에는 결과적으로 그렇게 할지 언정, 나의 행동에는 반드시 내안에 시작된 이유가 있어야 했다. 물론, 이러한 특징은 나를 다소 독불장군으로 만들었고, 나의 인생을 직선보다는 굽이 많은 곡선으로 만들었다. 많은 경우 남들이 예상한 결말을 맞이하거나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곤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들은 나의 인생을 다채롭고 다양한 색을 채울 수 있게 만들어줬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를 하기에 앞서 끊임없이 내스스로에게 그것에대한 질문을 던진다.
       
  • “말보다는 행동”
    • 이 가치관은 글을 쓰는 이유와 다소 반대의 방향을 가르키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글을 쓰는 이순간에 하나의 행동이라도 더 하는것이 이 가치관을 따르는 방법일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즉 말보다 행동을 하기위해 때로는 열심히 끄적인다. 나는 인생의 그 어떤 노력보다 매우 많은 노력을 통해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결과를 얻기 전 또는 어떠한 이유로든 원하지 않아도 '나’이기에 받아드려야 하는 것이 있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특정분야에 있어 “시기” 또는 “질투”의 감정이었다. 특정영역에 있어 나는 질투심이 매우 높았다. 특히 나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라던가, 내가 잘한다고 느끼는 영역에서는 매우 자주 느꼈다. 물론 이는 나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많은 경우 양날의 검이 되어 나의 감정을 힘들게 하였다. 특히 스타트업에 나와서는 이러한 감정을 매우 자주 느끼곤 하였다. 비지니스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것 또는 가지고 있는것에 비례하여 기회를 받거나 성공을 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런것에는 누가 더 낫고 나쁘고의 기준이 없을 뿐더러 치열한 경쟁속에서 끊임없이 자기의 존재를 알리며 살아남아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압도적인 차이의 아웃라이어가 되어 비교 불가능해야한다. 하지만 아쉽지만 나는 그런 아웃라이어는 아니었다.
      이러한 감정에 휘말리면, 항상 행동보단 말이 빨라지곤 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 글 또는 발표에서 AI에대한 이해도에 경쟁심이 느껴지면, 내가 얼마나 잘 아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야한다. 이를 위한 행동은 충분히 많다. 논문을 쓸 수 있고, 프로덕트를 만들수 있고 또는 오픈소스에 기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말로서 그것을 이루고 싶어한다. 말은 가장 즉각적이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노력은 하고 싶지 않지만, 달콤한 결과는 받고 싶은 것이다.
      이것을 바꾸기 위해 노력도 해보았다. 그러나 노력이 부족하거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는지 이런 감정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나귀 귀 임금님을 본 모자장수가 대나무숲을 찾듯, 나 역시 이곳을 찾았다.
       
  • “경험은 사유의 기회를 줄뿐, 사유를 주지 않는다.”
    • 이 가치관에 관해서는 2가지 경험이 있다. 먼저 어릴적 학교를 나왔을때 여행에대한 많은 기대가 있었다. 많은 훌륭한 사람들의 자서전에는 여행을 통한 배움이 항상 있었다. 그래서 나도 무작정 여행을 떠났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이후 나는 여행에대해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글을 쓰는 지금 나는 1년째 디지털 노마드로 살면서 세상을 여행을하고 많은 것을 느끼면서 살고 있다. 비슷하지만 다른 경험이 있다. 어릴적에 어른이라는 단어와 개념은 수도 없이 많이 듣고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하고 지켜본 어른들은 모두 같지 않았다. 소위말해 정말 어른같은 어른이 있었고, 나와 크게 다르지 않는 어른도 있었다. 또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 주변지인등을 통해 이것을 더 가까이서 느낄수 있었다. 이전과 다른 방향의 삶과 생각으로 살아가는 지인도 있고, 예전과 똑같은 형태의 삶을 살고 있는 지인도 있다.
      나는 앞의 두가지 사례에서 무엇이 더 나은 삶이고 옳은 방향인가를 논하고 싶은것이 아니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는지 이야기하고 싶을뿐이다. 오늘까지의 나의 결론은 경험은 삶에 영향을 줄수 있는 기회를 줄뿐,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첫 여행과 지금의 디지털 노마드의 여행은 본질적으로 같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여행에서 얻는 생각과 경험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욱 적극적으로 잡으려 할뿐이다. 주변의 지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이들이 경험하는 형태의 종류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그 경험에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그저 흘러갔을 뿐이다.
       
  •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다르다”
    • 나는 데이터마이닝을 전공하고 데이터 분석을 즐겨하지만,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발생한 현상에대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고 정의할 수 있는 과거의 한 사건에대해 맞춰서 해석한다고 생각한는 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하루는 반복이며 오늘의 자아와 내일의 자아는 같을까. 나는 적어도 나에대해서는 내일의 나를 오늘의 나의 연장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이것이 잠의 효과이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망각때문이든 이유가 어떻든 나는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이해해주고 온전히 기억해주는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오늘의 나의 형태가 되어 나라는 전체 인생의 일부분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내일의 나에게 그 바통을 넘겨야 한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자세히 오늘의 경험이 반복되지 않아도 기억의 한구석에 있는 경험과 생각을 꺼낼 수 있도록 자세하게 넘기려 한다.
 
거창하게 나열된 이유들은 의미없고 이유없는 무한한 끄적임의 행동들에대한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또 다른 끄적임일 수 있다. 혹은 다시 10년뒤 미래의 내가 공감할 수 없는 이유일 수 있다. 그러나 당장의 오늘의 나는 이러한 이유로 지금도 끊임없이 끄적이고 있다.
 

나는 왜 공유하려하는가

나는 지금까지 이러한 나의 끄적임을 타인에게 굳이 공유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유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던것도, 공유하는 것이 특별한 행동도 아니었다. 어릴적 새벽의 감성을 가지고 있는 싸이월드를 비롯하여, 블로그 그리고 개발자로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오픈소스등 주변에는 정말 많은 공유의 수단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딱히 공유를하고 싶지도, 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왜 지금에서야 공유를 시작하려할까.
 

왜 공유하지 않았는가.

이유는 명확했다. 사유가 아닌 그저 형태 없는 생각의 조각이었으며, 지식의 생성자가 아닌 전달자에 불과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세상이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정말 많은 데이터가 웹(web)상에 누적되고 있지만, 그 중 유의미한 정보의 양, 정보의 엔트로피가 늘었는가에대해서는 의문이었다. 다른 정보와 생각을 다른 형태로 재생산되고 이것을 접한 사람은 마치 자기의 사유라고 생각하지만, 그저 다른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뿐이라고 느꼈다. 나의 끄적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많은 경우 타인의 생각으로 나의 끄적임의 빈칸을 채웠고 이러한 이유때문에 굳이 공유를 하려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또한 앞서 공유한것처럼 나의 끄적임의 주요 독자는 내일의 나였기에 공유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이것을 잘 정리하여 나중에 자식에게 전달하고싶은 마음은 있었다. 나는 비록 무교이지만 성경과 탈무드의 형태를 좋아한다. 인간은 각자의 삶에서 맞이하는 경험과 선택의 순간에 본인만의 정의에따라 행동한다. 우리의 외모가 모두 다르듯 모든 이들의 정의가 다르다. 그렇기에 누군가 삶의 선택에서 도움을 요청한다면, 나의 정의가 아닌 그 사람의 정의가 발현되고 만들어질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언젠가는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펜시브와 같은 것이 등장할 수 도 있지만, 그전까지는 이렇게 나의 경험과 생각의 끄적임 형태로 주고 싶다.
 

왜 공유하려 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왜 이제 공유하려하는가. 이미 앞선 내용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지식의 전달자에서 지식의 생성자가 되기 위함이고, 누군가와의 공명을 위함이다. 사실 의미론적으로 공유를 할뿐이지 많은 이들이 찾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나의 다짐이다. 꽤 오랜시간 내 자신과 끄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아직도 나만의 사유라하기에는 형태없는 생각의 조각들이 마구잡이로 흩뿌려져 있다. 이것을 하나의 사유로 피어나기 위해서는 2가지, 시간과 타인과의 공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생각의 빈틈을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채우는 것은 비교적 어렵지 않아, <Thinking, Fast and Slow>에 등장하는 System 1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나만의 사고를 완성하는 과정에서는 System 2이 필요하다. 그저 생각의 망망대해에서 조류에 맞춰 흘러가는 것이 아닌, 확실한 방향과 목표를 가지고 항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노력과 계획이 필요하다. 이것이 내가 더이상 그저 생각주머니에 던지는 것이 아닌, 소위 캘박과 더불어 공유하며, 타인과의 공명을 기다리는 이유이다.
2023년 49주차 타이페이에서의 한주.
2023년 49주차 타이페이에서의 한주.

무엇을 끄적일것인가.

나의 끄적임은 조금더 정제된 글의 형태를 표방하고, 지식의 전달자에서 생산자가 되기 위해 조금 더 노력할 뿐 담으려는 내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게임의 형태로 표현된 인류의 욕망을 느껴보고자 어젯밤에 한 <발더스 게이트3>가 될수도 있고, AI 전공하며 흥미있게 연구한 <Neuro-Symbolic AI> 또는 <Graph Neural Network>의 미래를 이야기 할 수 있다. 혹은 <1년여 동안 6개의 나라, 10개여의 도시를 떠돌며 살았던 디지털노마드의 삶>을 쫒을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개발도상국을 보며 느낀 <국부론>과 <자본론> 그리고 그 다음에대해서 방구석 키보드 워리어 입장에서 글을 쓸 수도 있다. 스타트업에서 fully-remotely full-stack engineer로 지내며 생각한 <생산성 향상과 그로 인한 미래 기업의 형태 및 1인기업의 미래>도 충분히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같다.
어떠한 내용을 어떠한 형태로 남기든, 부디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의 이러한 끄적임에 충분히 공감해주길 바랄뿐이다. Dec 10, 2023